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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 09 Dec, 2025
6개월 프로젝트 결과, 유저는 '별로네요'라고 했다
6개월 프로젝트 결과, 유저는 '별로네요'라고 했다 완벽한 기획서 6개월이었다. 정확히는 183일.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에서 받은 과제. "MZ세대를 위한 새로운 금융 경험 설계". 우리 팀이 책임지고 가져가기로 했다. 나는 리서치부터 시작했다. 당연히. 20대 후반~30대 초반 유저 35명 인터뷰. 설문 응답 812건. 경쟁사 4개 서비스 벤치마킹. GA4 데이터 3개월치 분석. 데이터는 명확했다. 이 세대는 "복잡한 금융 용어 싫어함", "빠른 결과 원함", "시각적 피드백 중요". 퍼소나 3개 만들었다. 저니맵 그렸다. 페인포인트 15개 도출. 기획안은 87페이지. 모든 플로우에 근거가 있었다. "이 버튼을 여기 배치한 이유"부터 "이 문구를 쓴 이유"까지. 유저 인터뷰 인용구가 32개. 임원 보고 때 칭찬받았다. "역시 UX팀이 하니까 디테일이 다르네요." 개발팀도 좋아했다. "요구사항이 명확해서 좋아요." 나는 확신했다. 이건 된다고.3개월 개발 개발은 순조로웠다. 스프린트마다 내가 QA 들어갔다. 픽셀 하나까지 체크. "여기 버튼 사이즈 2px 크게", "이 문구 띄어쓰기 수정". 디자이너는 짜증 냈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요?" 나는 설득했다. "유저 테스트에서 이 사이즈가 최적이었어요. 데이터 보세요." 개발자도 피곤해했다. "이거 꼭 이렇게 해야 해요? 개발 공수가..." 나는 안 물러섰다. "UX 관점에서 이게 맞아요. 유저 경험이 우선이잖아요." PM은 중간에서 조율했다. "일단 기획자 의견대로 가보죠. 리서치도 많이 했으니까." 내부 테스트는 통과. 베타 테스트도 괜찮았다. 평균 평점 4.2. "사용하기 편해요", "디자인 예뻐요" 같은 피드백. 불안한 댓글도 있었다. "근데 이게 꼭 필요한가요?", "기존 방식이 더 익숙한데". 나는 무시했다. 소수 의견.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런칭 전날, 팀 회식. 우리는 성공을 확신했다. 런칭 후 2주 DAU는 목표의 63%였다. 가입자는 많았다. 근데 이탈률이 높았다. 첫 화면 본 후 74%가 나갔다. 설정 완료한 사람은 11%. 고객센터 문의가 쏟아졌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건가요?", "기존 방식은 어디 갔나요?", "너무 복잡해요".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리서치에서는 다 좋다고 했는데. 베타 테스트도 통과했는데. 뭐가 문제지? 회의가 잡혔다. 임원도 참석. 데이터를 펼쳤다. Hotjar 레코딩 봤다. 유저들이 헤매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직관적인" 플로우에서. "리서치 다시 해보시죠." 임원이 말했다. 나는 방어했다. "리서치는 충분히 했습니다. 유저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PM이 끼어들었다. "근데 숫자가 안 나오는데요. 적응 기간이 언제까지인가요?" 나는 답이 없었다.긴급 유저 인터뷰 일주일 만에 20명 인터뷰 잡았다. 첫 번째 유저. 29세 직장인 남성. "아 이거요? 깔았다가 지웠어요.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첫 화면에 튜토리얼 있었는데요?" "아 그거요? 스킵했어요. 길어서. 그냥 써보면서 배우는 게 편한데." 두 번째 유저. 32세 여성. "디자인은 예쁜데요. 근데 제가 원하는 기능을 찾기가 힘들어요." "메뉴 구조가 직관적으로 설계됐는데요. A-B-C 순서로." "음... 저는 그냥 옛날 방식이 편했어요. 찾기 쉬웠거든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비슷했다. "너무 새로워요." "배우기 귀찮아요." "이전 버전이 나았어요." "이걸 왜 바꿨어요?" 나는 녹취록을 보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만든 건 "더 나은 UX"가 아니었다. "기획자가 생각한 완벽한 UX"였다. 유저들은 완벽함을 원한 게 아니었다. 익숙함을 원했다. 편함을 원했다. 빠름을 원했다. 나는 리서치 때 물었다. "이상적인 금융 경험은?" 근데 물어야 했다. "지금 불편한 게 뭐예요?"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7차 회의 프로젝트 롤백 결정 났다. 6개월 기획. 3개월 개발. 2주 운영. 끝. "기존 버전으로 돌아갑니다. 새 기능은 일부만 추가." 나는 반대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유저들이 적응할 거예요. 마케팅을 더 하면..." PM이 끊었다. "숫자가 답이에요. 이탈률 74%. 이거 회복 불가능합니다." 나는 물었다. "그럼 제 리서치는요? 그 데이터는 다 뭐였나요?" "리서치는 맞았어요. 근데 기획이 틀렸죠." PM이 말했다. "유저가 원한다고 말한 것과 실제로 쓰는 건 달라요. 그걸 구분 못했어요." 맞는 말이었다. 근데 인정하기 싫었다. 회의 끝나고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9년 차 UX 기획자. 자존심만 남았다.3개월 후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 이번엔 다르게 했다. 리서치는 여전히 했다. 근데 질문을 바꿨다. "이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지금 불편한 점" 물었다. "원하는 기능"이 아니라 "자주 쓰는 기능" 물었다. "미래의 니즈"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 물었다. 기획서도 바꿨다. 87페이지 아니라 23페이지.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았다. 핵심만. "왜 이렇게 해야 하나"보다 "왜 지금 방식은 안 되나". 디자이너한테 2px 수정 안 시켰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개발자한테 완벽한 플로우 요구 안 했다. "일단 이렇게 만들고 AB테스트 해봐요." PM이 물었다. "확신 없어요?" "확신은 유저가 주는 거더라고요. 저는 가설만 세워요." 베타 테스트 결과. 평점 3.8. 이전보다 낮다. 근데 완료율은 높다. 41%. 피드백 읽었다. "별로 새롭진 않은데 쓸만해요", "익숙해서 좋네요", "빠르게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별로 새롭진 않은데". 6개월 전 나였으면 실패라고 생각했을 말. 지금은 안다. 이게 성공이라는 걸. 런칭했다. DAU 목표의 94%. 이탈률 34%. 완료율 38%. 임원 보고. "기대보다 낮네요. 근데 지속 가능해 보여요. 좋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PM이 말했다. "많이 배웠죠?" 나는 웃었다. "비싼 수업료 냈죠." 지금 요즘 후배들 멘토링 한다. 한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 리서치 결과랑 실제 반응이 다르면 어떡해요?" "당연히 다르지. 유저는 자기가 원하는 걸 모르거든." "그럼 리서치는 왜 해요?" "문제를 찾으려고.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걸 빨리 알려고." 후배가 끄덕였다.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9년 걸렸으니까. 책상 서랍에 아직 있다. 87페이지 기획서. 가끔 꺼내 본다. "완벽한 UX"를 만들려고 했던 내가. 부끄럽고 그립다. 지금은 안다. 완벽한 UX는 없다는 걸.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틀렸다는 걸. 유저가 "별로네요"라고 할 때 진짜 리서치가 시작된다는 걸. 9년 차. 여전히 배운다. 주로 실패에서. 그게 이 일이다.6개월 날린 건 아깝지 않다. 자존심 버리는 법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