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트랙

관리자 트랙 vs 전문가 트랙,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관리자 트랙 vs 전문가 트랙,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9년 차의 질문 출근했다.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GA4 대시보드가 뜬다. 퍼널 이탈률이 2% 줄었다. 지난주 리서치 결과를 반영한 개선안이다. 팀장이 슬랙으로 "굿굿"을 보냈다. 근데 기분이 이상하다. 7년 전, 주니어였을 때. 유저 인터뷰 하나 끝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 인사이트로 서비스가 바뀌겠지!" 하는 설렘. 지금은 없다. 그런 설렘. 인터뷰 20명 해도, 데이터 100만 건 분석해도, 그냥 일이다. 익숙하다. 잘한다. 근데 그게 다다. 팀장이 말했다. "내년에 팀 리드 해볼래?" CTO가 물었다. "UX 전문가 트랙 신설하는데, 관심 있어?" 두 갈래 길이다. 9년 차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관리자 트랙이 뭔지는 안다 팀장을 3년 봤다. 회의가 많다. 하루에 5개. 팀 동기화, 타팀 협의, 경영진 보고, 1on1, 채용 인터뷰. 기획은 직접 안 한다. 후배들 리뷰하고 방향 잡아주고 막힌 거 뚫어주고. 연봉은 오른다. 9천만원. 1억도 보인다. 스톡옵션도 있다. 지난주 목요일, 팀장이 10시에 퇴근했다. 경영진 보고 자료 만들었다. 주말에도 메일 확인했다. 월요일 오전 임원 미팅 준비. "리더는 이래야 해. 팀을 책임지는 거야." 맞는 말이다. 근데 나는, 그게 하고 싶었나? UX를 시작한 이유는, 유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문제를 찾고 싶어서였다. 데이터를 해석하고 싶어서였다. 관리자가 되면, 그걸 덜 한다. 대신 사람을 관리한다. 일정을 조율한다.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물어봤다. 팀장한테. 솔직하게. "관리자 되고 나서, 성장한다는 느낌 있어요?" 3초 멈췄다. "다른 종류의 성장이지. UX 전문성은... 음, 솔직히 예전만 못해. 근데 조직을 보는 눈은 생기고, 비즈니스 이해도는 올라가고." 다른 종류의 성장. 그게 내가 원하는 건가? 전문가 트랙은 뭘까 회사에서 전문가 트랙을 신설한다고 했다. Principal UX Researcher. 직급은 팀장급. 연봉도 비슷하다. 근데 팀원 관리 없다. 대신 R&D 역할이다. 회사 전체의 UX 리서치 방법론을 정립한다. 신규 프로젝트의 리서치를 리드한다. 외부 컨퍼런스에서 발표한다. "전문성을 더 깊게 파는 거죠. 회사의 UX 수준을 올리는 역할." 솔직히 끌린다. 유저 인터뷰를 100명 하는 것과, 인터뷰 방법론 자체를 개선하는 것. 후자가 더 재밌을 것 같다. 데이터 분석을 매일 하는 것과, 새로운 분석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것. 후자가 더 도전적이다. 근데 걱정도 있다. 전문가 트랙의 끝은 뭘까? 관리자는 명확하다. 팀장 → 실장 → 임원. 올라갈 길이 보인다. 전문가는? Principal 다음은? Senior Principal? 그다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50대에도 현업에서 리서치하고 기획할까. 그게 가능할까. 남편한테 물었다. 남편은 개발자다. Staff Engineer 트랙이다. "전문가 트랙도 막막하긴 해. 근데 코딩은 계속 할 수 있잖아. UX는?" 말문이 막혔다. UX는 트렌드가 빠르다. 5년 전엔 모바일 최적화였고, 지금은 AI UX고, 내년엔 뭐가 올까. 50대 UX 전문가가 20대 주니어보다 경쟁력 있을까?내가 잘하는 건 뭘까 주말에 포트폴리오를 펼쳤다. 9년 동안 한 프로젝트들이다. 신규 서비스 런칭 리서치. 유저 200명 인터뷰. 페르소나 12개 도출. 서비스는 성공했다. 기존 서비스 개선. A/B 테스트 30회. 전환율 15% 상승. 사내 우수사례로 발표했다. UX 방법론 정립. Figma 컴포넌트 시스템 구축. 전사 확산. 기획 속도 2배 빨라졌다. 보다 보니 패턴이 보인다. 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흩어진 리서치 데이터를 프레임워크로 정리하는 것. 인사이트를 체계적으로 도출하는 방법론.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문서. 그리고 "다리 역할"을 잘한다. 유저 리서치 결과를, 개발팀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다. 비즈니스 목표와 UX 원칙 사이 균형을 찾는다. PM과 디자이너 사이에서 조율한다. 이게 관리자의 역량일까, 전문가의 역량일까? 잘 모르겠다. 유튜브에서 UX 커리어 영상을 봤다. 해외 시니어 UX 리서처. 말했다. "리더십은 타이틀이 아니에요. 전문가도 리더십이 필요해요. 방법론으로 조직을 리드하는 거죠." 아, 그렇구나. 관리자와 전문가의 차이는, 리더십의 방향이구나. 관리자는 사람을 통해 리드한다. 전문가는 전문성으로 리드한다. 둘 다 리더십이다. 방향만 다르다. 그럼 나는, 어느 쪽으로 리드하고 싶은가? 실제 사례를 찾아봤다 링크드인을 뒤졌다. 국내 UX 전문가 트랙 사례. 거의 없다. 대부분 관리자가 된다. 해외는 좀 있다. Google의 UX Research Director. Amazon의 Principal UX Designer. 근데 대부분 20년 차 이상이다. 그리고 외국인이다. 한국 IT 업계에서 50대 UX 전문가. 사례를 못 찾았다. 이게 현실이다. 커피챗을 신청했다. 타사 UX 리드. 경력 12년. "저도 비슷한 고민 했어요. 결국 관리자 택했죠." 이유를 물었다. "전문가 트랙이 불안해서요. 회사가 언제까지 전문가를 대우해줄까. 조직개편 되면 제일 먼저 잘리는 게 전문 직군이거든요. 근데 팀장은 팀이 있으니까 좀 버티죠." 현실적인 얘기다. 다른 사람도 만났다. 스타트업 UX 전문가. 경력 11년. 관리자 안 된 케이스. "저는 행복해요. 여전히 유저 만나고, 리서치하고, 새로운 방법론 시도하고. 연봉도 나쁘지 않아요. 대신 이직이 잦죠. 3년마다 옮기는 것 같아요." 이직을 자주 해야 한다. 전문가는 한 회사에 오래 있기 어렵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를 찾아야 한다. 회사 안에 계속 챌린지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옮겨야 한다. 나는 그럴 준비가 돼 있나? 남편이 있다. 판교 집이 있다. 안정이 있다. 3년마다 이직하는 삶.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삶. 계속 증명해야 하는 삶. 할 수 있을까?여성이라서 더 고민이다 말 안 했는데, 이것도 변수다. 여성 관리자가 적다. 우리 회사 팀장 20명 중 여성은 3명. 임원은? 30명 중 2명. 현실이다. 남편은 걱정한다. "팀장 되면 야근 많아지잖아. 애 낳고 육아하면서 가능해?" 나도 걱정이다. 주변 여성 팀장들 본다. 육아랑 병행하는 사람. 진짜 힘들어 보인다. 새벽에 애 재우고, 밤에 보고서 쓰고, 주말에 이메일 확인하고. "할 만해?" 물으면, "할 만하지 뭐" 하는데, 눈빛이 피곤하다. 전문가 트랙은 어떨까? 업무 강도는 덜하다. 팀 관리 안 해도 된다. 내 전문성에 집중하면 된다. 워라밸이 좀 나을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함정이다. "여성이 관리자 안 되는 이유"로 쓰일 수 있다. "여자들은 전문가 트랙 선호하더라." 이런 식. 구조적 문제를 개인 선택으로 포장하는 것. 나는 그런 통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근데 동시에, 내 삶도 중요하다. '여성 관리자 롤모델이 되어야 해' 같은 사명감으로 내 커리어를 선택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한테 맞는 길을 가고 싶다. 그게 전문가면 전문가고, 관리자면 관리자고. 근데 뭐가 나한테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결정을 미루는 중 팀장한테 답을 보류했다. "조금 더 생각해볼게요." "그래, 천천히 생각해. 내년 상반기까지는 결정해야 하는데." 6개월. 6개월 안에 결정해야 한다. 남편이 물었다. "뭐가 제일 걸려?" "둘 다 장단점이 있어서." "그럼 뭐가 덜 후회될 것 같아?" 좋은 질문이다. 관리자 안 되면 후회할까? 나중에 '그때 팀장 했으면 임원 됐을 텐데' 하고 후회할까? 아니면 전문가 안 되면 후회할까? 'UX 전문성을 더 깊이 팠으면 세계적 전문가가 됐을 텐데' 하고? 어느 쪽도 확신이 없다. 그냥 둘 다 해보고 싶다. 관리자도 해보고, 전문가도 해보고, 그다음에 결정하면 안 될까? 근데 커리어는 그렇게 작동 안 한다. 한번 선택하면, 돌아오기 어렵다. 관리자 3년 하면, 실무 감각이 떨어진다. 전문가 3년 하면, 관리 경험이 없어진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다. 그래서 무겁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결정은 못 했다. 대신 실험은 시작했다.관리자 역할 맛보기후배 멘토링을 늘렸다. 주니어 2명, 매주 1시간씩. 그들의 기획서를 리뷰한다. 막힌 부분을 뚫어준다. 커리어 고민을 들어준다. 생각보다 재밌다. 그들이 성장하는 게 보인다. "선배 덕분에 해결했어요" 할 때 뿌듯하다. 근데 에너지가 많이 든다. 2시간 멘토링하면, 내 업무는 못 한다. 관리자는 이걸 하루 종일 하는 거다. 가능할까?전문가 역할 맛보기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AI 시대의 UX 리서치 방법론.' 주말마다 2시간씩 투자한다. ChatGPT API로 인터뷰 데이터 자동 분석. 패턴 추출. 인사이트 도출. 재밌다. 몰입한다. 주말이 기다려진다. 이걸 본업으로 한다면? 매일 이런 도전을 한다면? 설렌다. 근데 계속 가능할까?롤모델 관찰링크드인에서 10명을 팔로우했다. 관리자 트랙 5명, 전문가 트랙 5명. 그들의 포스팅을 본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하는지. 어떻게 성장하는지. 패턴이 보인다. 관리자는 "조직", "문화", "전략"을 얘기한다. 전문가는 "방법론", "케이스스터디", "인사이트"를 얘기한다. 나는 어느 쪽 글에 더 끌릴까? 솔직히 둘 다 끌린다. 답이 아직 없다 오늘도 출근했다. 팀장이 슬랙 DM을 보냈다. "생각 좀 됐어?" "아직이요." "ㅇㅋ 천천히" 천천히. 근데 얼마나 천천히? 9년 차다. 34살이다. 더 천천히 가면, 선택지가 줄어든다. 회사는 결정을 원한다. 빠르게. 나는 확신을 원한다. 명확하게. 둘이 안 맞는다. 점심에 동기를 만났다. 같이 입사한 UX 기획자. 걔는 작년에 팀장 됐다. "어때?" "뭐가?" "팀장." "할 만해. 근데 기획은 못 해. 아쉽지." "후회는?" "후회까지는. 근데 가끔 생각해. '내가 UX 전문성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들 불안하다. 관리자도, 전문가도. 완벽한 선택은 없다. 그냥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근데 그게 어렵다. 어쩌면 정답은 어젯밤에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을 섞는 건 어떨까? 관리자이면서 전문가. 전문가이면서 관리자. 팀을 리드하되, 여전히 리서치한다. 전문성을 깊게 파되, 후배를 키운다. 이상적이다. 근데 가능할까? 회사 구조가 그걸 허용할까? "팀장은 관리에 집중하세요. 실무는 팀원이 하는 거예요." "전문가는 전문성에 집중하세요. 관리는 팀장이 하는 거예요." 이게 회사의 룰이다. 근데 룰을 깨는 사람들이 있다. 애플의 조나단 아이브. 디자인 총괄이었지만, 여전히 직접 디자인했다. 구글의 켄트 벡.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펠로우. 관리자 아니지만, 전사에 영향력이 있다. 그들은 경계를 넘었다. 관리자와 전문가 사이의 경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한국 대기업에선 불가능한 꿈일까? 일단 6개월을 산다 결론을 못 내렸다. 대신 계획을 세웠다. 6개월 동안, 둘 다 해본다. 관리자 역할: 후배 멘토링 2배 늘리기. 타팀 협업 프로젝트 리드하기. 팀 동기화 회의 주도해보기. 전문가 역할: 신규 리서치 방법론 개발하기. 외부 컨퍼런스 발표 준비하기. UX 아티클 작성하기. 6개월 후, 어느 쪽이 더 재밌었는지 평가한다. 어느 쪽이 더 잘 맞는지. 어느 쪽이 덜 힘든지.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지. 그리고 결정한다. 완벽한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냥 내가 덜 후회할 선택을 하는 것. 그게 최선이다.9년 차의 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근데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일단 걷는다. 둘 다 걸어본다. 6개월 후에 다시 생각한다. 그게 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