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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ma에서 결재자 몇 명이 만든 프로토타입, 유저는 외면했다

Figma에서 결재자 몇 명이 만든 프로토타입, 유저는 외면했다

결재선은 통과, 유저는 이탈 월요일 아침 9시. 메일함에 '프로토타입 검토 요청' 떴다. CTO, 본부장, 팀장 세 명이 Figma 링크에 댓글 48개. "이 플로우 좋은데요", "색상 고급스럽네요", "이번엔 빠르게 갑시다." 열어봤다. 진짜 멋있다. 그라데이션, 마이크로 인터랙션, 토스트 애니메이션까지. 디자이너가 3주 밤샘한 티 난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이 플로우, 유저가 어떻게 쓸지 상상이 안 된다. "유저 테스트 일정 잡을까요?" 슬랙에 물었다. "일단 개발 들어가고, AB테스트로 보죠.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요." 또 이 패턴이다.결재자 3명의 프로토타입 이 프로젝트, 시작은 2월이었다. 목표: 신규 구독 서비스 출시. KPI: 전환율 12%. 일정: 4개월. 킥오프 때부터 신호가 있었다. "이번엔 빠르게 가봅시다. 레퍼런스 보면서 만들면 되죠." PM이 가져온 레퍼런스 10개. 전부 해외 서비스. Spotify, Notion, Linear. "이 UI 깔끔한데요." "이 인터랙션 좋네요." "우리도 이렇게." 회의실에서 3시간. 결정권자 세 명이 각자 좋아하는 디자인 짜깁기. 유저는 한 번도 안 나왔다. 나는 말했다. "타겟 유저가 누구죠? 30대? 40대? 구독 서비스 써본 경험은?" "일단 만들어보고 수정하죠. 유저는 다 비슷비슷해요." 비슷비슷하다고. 나는 9년 동안 500명 넘게 인터뷰했다. 비슷한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30대 직장인도, 결제 습관도, 앱 사용 패턴도 전부 다르다. 그래도 일단 넘어갔다. 급하다니까. 디자이너는 3주 동안 Figma에 살았다. 컴포넌트 400개, 프로토타입 링크 30개. 완벽했다. 화면 전환 타이밍 0.3초까지 맞춤. 결재선에 올렸다. CTO "Good", 본부장 "Approve", 팀장 "디자인 퀄리티 최고네요." 근데 나는 불안했다.유저 테스트 1일 차, 침묵 개발 들어가기 전에 우겨서 유저 테스트 3일 받아냈다. Maze로 원격 테스트 30명, 오프라인 인터뷰 10명. 예산 450만원. "이거 꼭 해야 돼요?" 설득에 2주 걸렸다. 첫 날. 34세 남성, 직장인, 넷플릭스·유튜브 프리미엄 구독 중. "자, 이 서비스로 구독 신청해보세요." 프로토타입 링크 보냈다. 15초 침묵.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첫 화면에서 막혔다. 메인 CTA가 그라데이션 버튼인데, 텍스트가 '시작하기'. 뭘 시작하는지 모르겠단다. "이 서비스가 뭐 해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디자인은 예쁜데." 다음 화면. 요금제 선택. 3개 카드가 가로로 쭉. 디자이너는 '스와이프 인터랙션'이라고 했는데, 유저는 스와이프를 몰랐다. 첫 번째 카드만 보고 "이게 전부예요?" 결제 화면. 카드 정보 입력 폼이 16개 필드. "너무 많은데요. 꼭 다 써야 돼요? 그냥 네이버페이 안 돼요?" 10분 테스트. 완료율 0%. "죄송한데, 이거 그냥 넘어가도 돼요?" 나는 녹취록 타이핑하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30명의 데이터, 0명의 성공 Maze 결과 나왔다. 평균 완료율: 23%. 평균 소요시간: 8분 32초. 목표는 2분이었다. 히트맵 봤다. 첫 화면에서 73%가 스크롤만 하다가 이탈. CTA 클릭률 18%. 요금제 화면. 체류시간 평균 2분 14초. 유저는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이 차이가 뭐지?" 댓글 12개. 결제 화면 진입률: 9%. 결제 완료율: 2%. 30명 중 1명만 성공. 오프라인 인터뷰 10명. 패턴이 보였다. "디자인 예쁘네요. 근데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7명) "클릭할 곳을 못 찾겠어요." (5명) "너무 복잡해요. 그냥 앱스토어 설명 보고 결제하면 안 돼요?" (8명) "이 서비스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10명) 가장 충격적인 건, 35세 여성 인터뷰이었다. "이 화면 진짜 예쁘네요. 어떤 디자이너가 만들었어요?" 칭찬하면서도 3분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 예쁜 걸 보러 온 게 아니라 구독하러 온 건데. 나는 인터뷰 끝나고 화장실 가서 한숨 쉬었다. 회의실 3시간, 또 시작 리포트 작성했다. 50페이지. 인사이트 요약 10장, 히트맵 8장, 인터뷰 발췌 20장, 개선안 12장. 회의 잡혔다. 참석자: CTO, 본부장, 팀장, PM, 디자이너, 개발자 3명, 나. 10분 발표했다. "완료율 23%, 첫 화면 이탈 73%, 유저는 이 서비스가 뭔지 모름. 재설계 필요." 침묵 10초. "그래도 디자인 퀄리티는 좋잖아요." 본부장이 말했다. "유저가 이해를 못 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30명이 대표성 있나요? 통계적으로." PM이 물었다. "정성 조사는 5명만 해도 80% 이슈 발견됩니다. 30명이면 충분해요." 내가 말했다. "그래도 일정이 너무 밀렸는데, 일단 출시하고 수정하면 안 될까요?" 팀장. "첫 인상이 전부예요. 출시하고 수정하면 이미 유저는 떠나요." 나. "근데 이미 개발 30% 진행됐거든요." 개발팀장. 회의실 온도가 내려갔다. CTO가 말했다. "결재선 올릴 때 왜 이 얘기 안 했어요?" "유저 테스트 하자고 했는데 일정 때문에 밀렸어요." 나는 슬랙 로그 캡처 화면 띄웠다. 2월 15일, 3월 2일, 3월 18일. 세 번 요청했다. 침묵 30초. "알겠습니다. 2주 드릴 테니 핵심만 수정하세요." CTO. 회의 끝. 3시간 걸렸다. 나는 자리 돌아와서 모니터 앞에서 멍 때렸다. 손이 떨렸다. 2주 만에 뒤집기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 디자이너랑 앉아서 우선순위 정리했다. 바꿀 것: 첫 화면, 요금제 화면, 결제 플로우. 유지할 것: 색상, 타이포, 브랜딩. 첫 화면: 그라데이션 버튼 없앴다. "시작하기" 대신 "월 9,900원으로 시작". 서비스 설명 3줄 추가. "이 서비스는 OOO을 해결합니다." 요금제: 카드 3개에서 리스트로 변경. 각 항목마다 "누구에게 맞나요?" 추가. "한 달에 10권 이상 읽는 분께 추천" 같은 구체적 설명. 결제: 16개 필드에서 6개로 축소.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추가. "30초 만에 완료" 텍스트 강조. 수요일에 러프 프로토타입 완성. 목요일에 퀵 테스트 5명. 완료율: 80%. 평균 소요시간: 1분 52초. "오, 이제 이해되네요." "빠르네요." "이 설명 있으니까 좋아요." 금요일에 최종 디자인. 월요일에 개발 재시작. 2주 만에 뒤집었다. 출시 4주 후, 숫자 5월 15일. 정식 출시. GA4 대시보드 매일 확인했다. 1주차: 전환율 8.2%. 목표는 12%. 2주차: 9.1%. 3주차: 11.4%. 4주차: 12.8%. 목표 달성. 근데 원래 디자인이었으면? Maze 데이터 기준으로 시뮬레이션하면 전환율 3% 예상. 450만원 리서치 비용으로 전환율 9.8%p 올렸다. 구독 신규 유입 월 1,200명 기준, 월 매출 1,400만원 증가. ROI 311%. 리포트 작성해서 공유했다. 본부장한테 "수고했어요" 슬랙 받았다. 그게 전부였다. 멋진 디자인 vs. 작동하는 디자인 이 프로젝트 하면서 배운 거. 결재자가 좋아하는 디자인 ≠ 유저가 쓰는 디자인. Figma에서 예쁜 거랑, 실제로 작동하는 건 다르다. 그라데이션 버튼이 클릭률 높이는 게 아니라, "이걸 누르면 뭐가 되는지" 명확한 텍스트가 클릭률 높인다. 마이크로 인터랙션 멋있어도, 유저가 그 화면까지 못 가면 의미 없다. 레퍼런스 10개 짜깁기해도, 우리 유저 맥락이 다르면 안 맞는다. Spotify 쓰는 20대랑 우리 서비스 타겟 35세 직장인은 다르다. "일단 만들고 수정하자"는 핑계다. 출시 후 수정은 비용이 10배 든다. 개발 리소스, 유저 신뢰, 브랜드 이미지. 다 까먹는다. 가장 중요한 건, 급할 때일수록 리서치부터. 2주 리서치가 아까워서 건너뛰면, 나중에 2개월 갈아엎는다. 나는 이거 7번 봤다. 9년 동안. 유저 테스트 안 하고 출시한 프로젝트 5개, 전부 재작업. 평균 3개월 지연. 유저 테스트 하고 출시한 프로젝트 8개, 일정 준수율 87%.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결재선이 아니라 유저가 쓴다 목요일 저녁. 팀 회식. 본부장이 물었다. "그때 유저 테스트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출시하고 2주 뒤에 전환율 3% 보고, 긴급 회의 했을 거예요. '왜 안 되지?' 하면서." "그랬겠네요." "그리고 디자이너 탓했겠죠. '디자인이 문제다', 'UI를 바꿔보자'. 근데 문제는 디자인이 아니라 유저 이해 부족이었어요." "맞아요. 그때 우리 유저가 누군지 제대로 몰랐죠." "결재선 통과하려고 만든 프로토타입이랑, 유저가 쓰려고 만든 프로토타입은 달라요. 우린 후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맨날 전자를 만들죠." 본부장이 웃었다. "다음엔 리서치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에도 똑같을 거다.' 하지만 입 밖에 낸 말은 달랐다. "네, 감사합니다." 9년 차, 여전히 퇴근길 지하철. 오늘도 Figma 커뮤니티 둘러봤다. 멋진 프로토타입 천지다. 그라데이션, 3D, 글래스모피즘. 댓글 보면 "Wow", "Amazing", "How did you make this?" 근데 "유저 테스트 결과는?" 묻는 댓글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작동하는 것보다. 예쁜 것에 집중한다. 이해하기 쉬운 것보다. 결재자 설득에 집중한다. 유저 설득보다. 나는 9년 차다. 여전히 같은 싸움 한다. "유저 테스트 꼭 해야 돼요?"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요." "일정이 없어요." 매번 설득한다. 매번 숫자로 증명한다. 매번 이긴다.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에서 또 시작한다. 언젠간 바뀔까. 유저 리서치가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날이 올까. 결재선 통과가 아니라, 유저 통과가 목표인 날이.결재자 3명이 좋아해도, 유저 30명이 외면하면 실패다.